본문 바로가기

약차 & 한방차

[스크랩] 다도 - 차향을 문향과 예향으로 옮긴 추사 김정희

 

 

 

 

차향을 문향과 예향으로 옮긴 추사 김정희

 

 

한국인에게 차(茶)는 무엇일까. 차는 중국이 원산으로 중국에서는 필수음료이지만 한국에서는 기호음료의

성격이 강한 편이다. 동아시아에서 차의 비조는 신농(神農)이다. 오늘날 신농은 으레 중국인의 조상으로 통하지만

고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영토의 변경과 인종의 섞임과 민족의 이동으로 인해 차라리

고대 대륙문화는 우리와 공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차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흔히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돌아온 시점인 신라 흥덕왕

 3년(828년)으로 보면 약 1200년이 된다. 또 신라 경덕왕 시기(天寶年間, 742∼756) 견당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화엄과 선종의 교체기에 공적을 세워 나라에서 장생표주를 세운, 보림사 창건주 원표대사를 기점(경덕왕 18년,

759년)으로 잡으면 대렴보다 70년 앞선다.

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이 왕명을 내려 옛 가야의 왕손들로 하여금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게 한 연도(661년)를

 기점으로 잡으면 대렴보다 167년 앞선다. 더욱이 가야의 허 황후가 김수로왕과의 결혼예물로 차씨를 가지고 들어온 것(AD 48년)을 기점으로 잡으면 약 2000년 전으로 껑충 올라간다. 그래서 차의 역사는 관점에 따라 달리 쓸 수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자화상.
 

한국의 차 전통은 이렇게 가야·삼국·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른다. 불교가 국교이던 신라와 고려의 차 문화는

 역사적으로 풍성하였다. 차를 일찍부터 접한 무상선사(無相禪師, 684∼762)는 입당구법(入唐求法) 후 중국

사천지방에서 활동하면서 일상의 차와 선(禪)의 묘미(妙味)를 결합시켜 ‘선차지법(禪茶之法)’을 최초로 발했고,

구화산의 김지장(金地藏, 696∼794)은 신라에서 가져간 차씨로 ‘금지차(金地茶)’를 중국 땅에서 퍼뜨려 신라의

 차 문화의 융성을 알렸다.

 

이 밖에도 구례 화엄사 연기조사(緣起祖師)의 효심과 차 공양, 선(禪)차(茶)악(樂)으로 풍류차의 종조가 된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에는 ‘한명(漢茗)’이라는 글자가 우리 차 문화의 역사를 말한다.

또 ‘끽다거’로 유명한 조주(趙州)의 법형제인 철감도윤(鐵鑑道允), 독자적 선(禪)이론인 무설토론(無舌土論)을

이룬 무염선사, 조계종 종조(宗祖)인 도의(道義)국사,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神)이 된 범일국사 등 차와 관련된

 승려들은 이루 헬 수 없을 만큼 많다.

고려에 들어오면 차 문화는 더욱더 황금기를 구가한다.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은 선차의 황금기를 열었고,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은 ‘동다(東茶)’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뇌원차(腦原茶)’

를 송(宋)에 수출하였다.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은 일연선사의 차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이미 잘 나타나 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은 화려했던 고려의 차 문화를 오늘에 전해준다.

고려 말에 이르면 선승(禪僧) 태고보우, 나옹화상, 백운경한 등 출중한 승려들이 있었다.

고려말에 이르면 점차 승려들이 중심이 되었던 차 전통은 선비들과 도사들이 잇기 시작한다.

청평거사(淸平居士) 이자현(李資玄),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행촌(杏村) 이암(李?),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이 차 문화를 이끌어간 주역이다. 이즈음 이암과 이색이 중심이 된

두문동(杜門洞) 차인들은 새로운 선차(仙茶)의 전통을 조선에 전해주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 차맥에 있어 조선 전기는 초암차(草庵茶)의 원조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을 만나고,

 그 전통의 맥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은자들 집단인 ‘두문동(杜門洞) 차인’들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선가적(仙家的) 전통과 풍모를 발견하게 된다.

‘두문동 72현’과 이들 사이에서 유독 이름이 높았던 육은(六隱), 즉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 수은(樹隱) 김충한(金?漢) 등은

은(隱)자를 돌림자로 쓰는 호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은일(隱逸)한 정신이 강하여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청담학파에 비견할 만한 선풍(仙風)을 생활화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

 

이색(牧隱)-정몽주(圃隱)-길재(冶隱)로 이어지는 소위 삼은(三隱)의 성리학은 점필재로 이어진다.

어떤 점에서는 영남사림의 성리학은 실은 선가적 풍모를 동시에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들의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정신이 도리어 사림의 뿌리를 더욱더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두고 청류(淸流), 청담(淸談)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말(高麗末) ‘두문동(杜門洞) 차인(茶人)들’의 차정신을 간과하는 것은 한국차사(茶史)와

그 맥을 이어가는 데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여말선초에 형성된 ‘두문동 72현’과 ‘청담학파’는

역성혁명과 계유정란이라는 혼란과 곤경을 거치면서 더욱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매월당과 점필재가 만나게 되는 것도 같은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스스로 은퇴한

선비들이 가까이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차이다. 점필재의 제자들은 줄잡아 20여명이 되는데 이 중

차시를 남긴 차 마니아들도 10여명이 된다. 이 중 한재(寒齋) 이목(李穆)이 으뜸이다.

한재 이목은 ‘다부(茶賦)’를 남겼다. ‘다부’는 ‘동다송(東茶頌)’보다 약 350년 앞선다.

점필재가 차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그의 스승인 길재, 그리고 그 위로 목은, 이색이 차를 좋아한

마니아였기 때문이다. 야은은 이색, 정몽주, 권근으로부터 성리학을 익혔는데 이것이 집대성되어 고스란히

점필재에게 전수된다. 매월당 김시습의 등장을 계기로 선(仙, 道)과 차(茶)가 만나 한국의 새로운

 차 문화로 승화된다.

초의 선사 초상화.

 

수천 년을 이어온 한국 차사(茶史)를 관통하여 볼 때 ‘다성(茶聖)’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다산·초의·추사는 물론 근세 혹은 근대 차의 중흥조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다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어딘가 걸맞지 않다. 이들에게 다성이라는 말을 붙이면

한국의 중세 이후의 차사는 매우 졸속 천박하게 되고, 차의 역사를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망발을 범하게 된다.

그동안 66회의 차맥을 이끌어오면서 필자가 발견한 인물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다.

그는 한국 선차의 맥을 잇고, 그것을 ‘초암차’로 발전시켜 일본으로 하여금 그 정신을 잇게 함으로써

동아시아 15∼16세기의 차 정신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차에 정통하였고,

승속을 넘나들었고 유불선을 회통한 인물이기에 더욱 적당하다고 보인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생존연대는 약 330년 차이가 난다.

 그런데 두 분은 시공을 초월하여 전인적 차 생활을 한 점, 자연친화적 삶을 영위한 점, 그리고 민중의 삶을

 걱정하는 모습이 너무나 닮아있다. 방외인의 방랑생활을 한 매월당, 오랜 유배생활을 한 다산은 차를 기르고

차를 즐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선비정신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매월당은 초의(草衣, 1786∼1866)보다 350여년 앞선 인물이다. 초의를 ‘다성’이라고 하여 차의 중심인물을

하대로 낮출 이유가 하나도 없다. 다성이라고 하면 적어도 차의 생산과 법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사를

관통하는 차의 정신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구비한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후대의 연구가

거듭하여도 모자람이 없고, 차인들이 그 인품을 본받고 따라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매월당이 임종을 맞은 충남 부여군 만수산 무량사.

 

그동안 차계는 언제부턴가 누구에 의해서인가 초의(草衣) 의순(意恂)을 ‘다성’이라고 불러왔다.

이는 초의 의순을 높이는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속단이며, 도리어 초의 스님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초의 스님의 역할을 있는 대로 평가하고, 제자리로 돌려놓음으로써, 한국 차의 물줄기인 본류와

 지류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 초의 ‘다성론’은 한국 근대 차의 신화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마치 첫 단추를

 잘못 낀 것과 같다.

위진남북조 현학(玄學)의 대가인 라석(羅石) 손병철(孫炳哲) 박사(중국 북경대학)는 그의 ‘다성론’에서

 ‘초의가 다성(茶聖)이 아닌 다승(茶僧)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지적한다.

“첫째, 초의는 다산(茶山)의 제자로 차에 대한 식견과 그 시문에 있어서도 스승을 넘어서지 못한 일반 수준이다.

둘째, ‘다경’처럼 떠받드는 초의의 장시 ‘동다송’(원제목은 ‘東茶行’)은 동국 즉 우리나라의 차에 대해 읊은

것이라기보다 대부분 중국차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중국 문헌과 고사의 인용에 급급한 나머지

 우리 차에 관한 내용은 전체 내용의 17분의 1에 해당하는 겨우 4구절뿐인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일반 차시에

불과하다. 시품(詩品)의 격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의 그 ‘다송’은 필사되는 과정의 오자와 무지한 오독으로

 얼룩진 하나의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흔히 초의의 저작처럼 잘못 알고 있는 ‘다신전’은 명나라 말엽

중국에서 발간된 생활백과사전 격인 ‘만보전서’ 가운데 차에 관련된 기록만을 단순히 베껴 쓴 것에 스스로

‘다신전’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왜 남의 글에 자기 제목을 붙였을까? 그의 ‘동다송’ 협주에 밝힌

 대로 “나물국 삶듯 솥에 끓여” 퍼마시던 당시 속된 승가의 차 문화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근대 한 계몽주의자의

 궁색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당시 초의차가 대단했던 것도 아니다. 소위 ‘전다박사’의 차는

다산에게 배운 떡차일 따름이다.

 

넷째, 무위 무상의 도를 닦는 선승(禪僧)과는 달리 일찍이 다산초당을

기웃거린 학승(學僧)으로서 어쭙잖은 시·서·화 한묵(글씨는 그의 스승 다산체의 아류이고, 시는 추사에 못 미치며,

그림은 습작 수준이다)까지 두루 갖춰 경향 간의 세도가들과 유명 시인 묵객과 어울려 풍류를 즐긴 것도 그렇지만

 그의 언어 묵적으로 남긴 결과물을 볼 때 다승으로서도 격이 그다지 높다고는 할 수는 없으니, 조선말기

단절되어가던 차 문화에 기여한 공력에도 초의 의순에게 ‘다성’이라는 존호는 심히 부적절하다.”

차에 성자를 붙이자면 초의보다는 다산이 낫겠지만, 차라리 원효의 무애적 삶처럼 승속을 자재롭게

오고 간 초암차(草庵茶)의 창시자 매월당 김시습이 차의 중시조(中始祖)로서 다성의 조건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한다. 차인 이달희 시인도 “초의보다는 다산, 다산보다는 매월당이 ‘다성’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 매월당은 선차(仙茶)의 맥에서 중심인물이다”고 말한다.

매월당이 쓴 조동오위요해 서문

 

 

차인과 차시의 격뿐만 아니라 부당한 정치권력에 목숨으로 맞섰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서의

 거룩한 실천적 삶과 해외 일본에까지 우리 차 문화를 널리 전파한, 한국 차 역사에서 유일한 분이

 곧 매월당 김시습이기 때문이다. 다성 김시습은 우리 차의 거룩한 중시조로서 그 존호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매월당은 초암차를 일본에 전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사신이었던 정사(正使) 준초서당(俊超西堂)과

부사(副使) 범고수좌(梵高首座)와 헤어진20년 뒤, 양양 진전사(陳田寺, 우리나라 선종 초전도장)에서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70객의 범고와 다시 만나 그의 수행청년학승이던 수증상주(守證上主)에게

 일연의 저서(우리나라에선 이미 없어진) ‘증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전해 오늘의 일본 조동종(曹洞宗)을

있게 하는 데 일조한다. 말하자면 차와 선 양면에서 일본을 깨우치는 셈이다.

매월당은 또 6년의 경주시대를 마감하고 상경하여 수락산 시대를 여는데,

그곳에서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了解)’라는 주석서를 쓰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훌륭한 인물을 제쳐두고

초의를 앞세우며 동아시아의 차계에 나서는 것은 참으로 차를 중흥시킨다고 하면서 도리어 차의 역사를

송두리째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일본의 초암차는 매월당의 초옥(草屋)·초정(草亭)·모암(茅菴)의

 정신에 불교적 의미인 암(庵)자를 결합하여 재가선종을 이룩한 명칭인 것이다. 매월당이야말로 재가선종의

 모델로 삼기에 적당한 인물이다. 차인들은 이제 동아시아적 안목에서 차의 역사를 재편성하고

재인식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차인들은 이제 우물 안의 개구리 식으로 세상을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차의 훌륭한 조상을 발굴하고, 제대로 조명함으로써 우리의 위치를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초의는 다승에 불과하다. 그동안 한국 차계는 차 문화를 부흥한다는 명목 아래 일지암을 복원하기는 했으나

 초의다맥의 조작, 차 단체들 간의 반목과 질시를 일삼으며, 차 문화를 도리어 사치와 허영의 질곡 속으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정작 차를 마시는 인구는 줄어드는 퇴보를 보였다.

차 연구자와 차인의 행태라는 것이 우리 조상의 진정한 차 정신을 찾는 데는 등한하면서도

 일본 다도를 추종하거나 중국차를 음용하고 모방하기에 급급한 추태를 보였다.

 소박한 차 문화, 청허(淸虛)의 정신은 도망가고 진정한 웰빙(well being)과 웰다잉(well dying)의

주인이 되는 기회도 놓쳐버리고 있다. 이제 다시 차인들은 청담의 차를 준비할 때이다.

매월당이 경주 용장사에서 쓴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차시 ‘일동승 준장로와 이야기하며(與日東僧俊長老話)’

를 음미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시에서 ‘해월(海月)’은 남산 너머 동해에 비친 달을 의미한다.

경주 사람들은 흔히 동해가 지척인 까닭에 경주 시내에서도 바다 해(海)자를 즐겨 썼다.

“멀리 고향을 떠나 쓸쓸한 마음이여! 옛 부처와 산꽃들로 적적함을 달래노라.

 철 다관에 차를 달여 손님에게 대접하고 질화로에 불을 지펴 향을 사른다.

 

늦은 봄 바다에서 떠오른 달 사립문에 들어오고 비 그친 산속에는 사슴들이 뛰놀겠지.

 길을 찾는 나그네 마음 서로 아담하니 밤 새워 맑은 이야기 나누어도 좋으리라.

 

”(遠離鄕曲意蕭條/ 古佛山花遺寂寥/ 鐵罐煮茶供客飮/ 瓦爐添火辦香燒/ 春深海月侵蓬戶/

 雨歇山?踐藥苗/ 禪境旅情俱雅淡/ 不妨軟語徹淸宵)(시인 이달희 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출처 : 건강의 터전 내일의 향기
글쓴이 : 정아(靜娥) 원글보기
메모 :